<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거꾸로 된 <샤이닝>이지 않을까? 고립된 장소에서의 살인 사건과 광인을 다루지만, 그 역학이 반대로 작용한다. 드라마에는 '살인마'라는 명백한 가해자가 존재하는 한 편,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은 피해자가 아니며, 피해자와 밀접한 관련도 없다. 이 이야기는 '살인'이라는 극악무도한 행위가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까지 얼마나 끔찍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오염된 삶의 터전'이라는 전제는 주로 호러 영화에서, 그것도 대부분은 대전제 수준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의 접근은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심령스팟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끔찍한 행위의 역사가 탄생시킨 저주받은 장소가 어떤 공포를 선사하는지 익숙해져 있다. 다만, 그 역사 속에 간접적으로 휘말려야 했던 이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다룬 바가 없었다. 주인공들은 피해자의 유가족도, 가해자의 친인척도 아니지만 살인 현장의 목격, 살인에 대한 의심 같은 간접적인 영향만으로도 심신의 붕괴를 맞이한다. 예기치 않은 보금자리의 오염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이들을 스크린 위에 내건다.
문제는 작품 속에서 살인마들은 주인공의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도적이지 않든, 의도적이든, 그들은 자꾸만 인물들의 삶 속으로 침투한다. 그리고 이 '오염'은 삶에 지나치게 강한 흔적을 남긴다. 때문에 이야기는 광기와 광기의 대결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된다. 작품이 끊임없이 주인공들이 겪는 오염을 누군가 하나 끝을 봐야 마무리 될 수 있는 문제로 만들기 때문이다. 미스터리의 해결이나 사건의 진상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는 온전히 그 오염으로부터 살아남고, 원래의 삶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처절한 사투일 뿐이다.
2020년대는 나와 관련되지 않은, 그러나 명백하게 일어나고 있는 참상을 시도때도 없이 목도하는 시대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그 희박한 확률로 발생하는 참극의 당사자는 아니더라도, 그 어느 때보다 이를 많이 목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그 거리가 매우 가까워졌을 때 우리가 어떤 감정을 대면할지에 대한 단상을 포착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어떤 일'들에 대한 경각심을 강조한다.
나레이션을 통한 주인공의 질문은 이러한 작품의 태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진다면, 그 소리가 들렸겠는가, 아니면 들리지 않았겠는가.' 물론, 그토록 커다란 나무가 쓰러진다면 소리가 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만약 그곳에 아무도 없다면, 나무가 쓰러진 소리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으니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
하지만 거기엔 늘 누군가 있다. 텅 빈 물가에 돌을 던지면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안에 숨쉬며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들이 파장을 느끼는 것처럼. 그리고 때로는 그 돌이, 존재했는지도 모르는 수면 아래 개구리의 터전을 망가뜨릴지도 모른다.
외면하고 싶은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문제를 맞닥뜨려 대면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나무는 쓰러질 것이고, 그 소리를 외면하다 종국에 터전을 잃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