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코피의 원죄>는 작가 스스로가 밝힌 것처럼 <도라에몽>의 안티테제 같은 작품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렇기에 작품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지점은 <도라에몽>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각자의 심연에 잠식된 주인공들에게 타코피와 그의 도구는, 도라에몽의 그것과 다르게 어떠한 행복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작품의 태도는 생각보다 단순명료하다. '간절히 원하는 것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타코피는 시즈카와 마리나에게 어떻게든 행복을 가져다 주겠다고 선언하지만 결코 이뤄내지 못한다.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고, 행복을 좇아 광적으로 달려간 목적지에는 파멸적 현실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타코피가 스스로를 내던져 장렬히 산화한 후 자신의 존재를 주인공들의 관계의 매개로 전환시키면서, 어떻게 해도 바뀌지 않을 것만 같던 참상의 미래는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타코피의 '어떻게 해서든 시즈카와 마리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라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타코피는 이들 각자를, 어느 한 개인을 또 다른 개인으로부터 유리시켜 구원하는 것이 아닌, '우리'라는 이름의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행복한 미래라는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타코피의 독백처럼, 우리는 말을 통해 서로에게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결코 각자를 이해할 수 없다. 이토록 독립된 객체로 존재하는 우리는 자신의 존재와 현실을 공유함으로써 활기를 찾을 수 있고, 독백 속에 갇혀 있기만 하면 끝없이 침잠한다. 작품 속 주인공들처럼, 불행의 깊이와 무게를 더할 뿐이다.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하던 시즈카와 마리나가 작품의 말미에 관계의 변화를 맞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떻게든 기피하고자 했던 '불행'을 서로가 공유할만한 무언가로 수단화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을 얻는 괘씸한 존재들이 바로 우리 인간이니까.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관계의 단초가 된다. 도라에몽의 도구 역시, 잘 들여다보면 도구 자체가 주인공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그 도구로 무엇을 하느냐,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느냐가 주인공의 행복과 직결된다.
타코피가 가진 원죄는, 단순히 그가 지구에서 기원한 생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짊어진 것일 뿐이다. 그리고 시즈카와 마리나, 나오키가 아직 그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할만큼 미성숙했던 탓이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감당하기에 지나치게 매정한 현실이 실재하는 탓이다.
한 꺼풀 밖의 세상으로 나올 수 없다고 믿는 모든 이들에게, 먼저 앞서 온 '타코피들'로서 용기와 힘을 내라는 전언을 보낸다.